2008년 02월 08일
가족사에 깃든 한국 현대사
우리가족은 꽤나 특이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보통 가족이라함은 같은 지역에 사는 것이 당연할진대,
우리가족은 매우 띄엄띄엄 떨어져 살고 있다.
일단 증조할아버지부터 살펴보자면,
증조할아버지는 원래 황해도 사리원이 고향이신데 한국전쟁당시(1950) 남쪽으로 피난을 오셨다.
증조할아버지는 첫째 아들은 아니지만 당신의 가족들을 데리고 일단 3.8선 이남으로 내려오신 것이다.
그래서 증조할아버지는 나의 할아버지를 비롯한 여러 자식들을 데리고 전쟁의 불길을 피하고 있었으나
휴전이 되면서 영영 당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이건 나의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완전히 휴전이 이루어지기 전에 나의 할아버지는 제주도에 내려오셔서 나의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당시 꽤나 급진적인 생각을 갖고 계셨던 나의 할머니는 제주도를 떠난다는 생각에 반대를 무릅쓰고 육지로 떠나게 된다.
왜냐하면 할머니께서는 많은 형제들을 밑에 둔 첫째딸로 머리는 똑똑했지만 공부는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당시 제주도는 너무나 황폐한 땅이었기때문에 어린나이었지만 꼭 이 땅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하셨단다.
그래서 할머니는 이북 남자와 결혼하고 강원도 원주에서 나의 아버지를 낳으셨다. (1955)
당시 할머니의 나이 스물하나였다.
그 후 강원도에서 서울로 이사를 하고 할머니는 아버지말고 세 아들을 더 낳게 된다.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에 집을 마련해 살게 되고 아무것도 없었지만 나름 단란하게 살던 가족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1958년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사고로 다리를 다치게 되고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였지만 12시간에 거친 대 수술을 자라면서 5~6번 거치며 아버지는 성장하게 된다.
그리하여 첫째 아들이었던 아버지는 그 나름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된다.
아버지의 동생들은 다리를 다친 형을 보살피고 부모님을 도와 똑똑한 아이들로 자라났다.
1970년대, 아무것도 가진것 없는 아버지의 가족은 오직 공부만이 살길이라 생각하며 끊임없이 공부를 했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건국대학교 사학과, 둘째 삼촌은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셋째 삼촌과 넷째 삼촌은 연세대학교 상경대학에 진학,
아들 넷 있는 집에서 꽤나 이름있는 학교를 들어갔다며 주위의 부러움을 사게 된다.
하지만 1978년 할아버지가 갑상선 암으로 돌아가시고, 형제들은 전보다 더 곤궁한 삶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학생 넷 있는 집이었지만 등록금을 제대로 대주지 못해
아버지를 제외한 나머지 삼촌들은 과외를 하면서 등록금을 대거나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녔다.
당시 통행금지가 있었으므로 삼촌들은 밤새 과외를 하고 아침에 집에 와서 가방만 챙기고 다시 학교를 나가는 생활이 반복,
돈도 벌어야 하고 공부도 해야하는 이중생활고에 시달리게 된다.
하지만 사회의 엘리트로 자라 아버지는 제주도에서 교사, 둘째 삼촌은 IBM, 셋째 삼촌은 한화증권, 넷째삼촌은 MS에 취직,
그야말로 지적 자원을 이용한 성공의 전형적인 케이스를 보여주게 된다.
그리하여 네 형제 모두 차례대로 결혼을 하게 되고 아이를 낳았으며 현재도 학업을 우선시하는 아버지들이 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맨바닥, 쓸만한 것이라곤 머리밖에 없다는 생각에 공부만 했던 나의 아버지와 삼촌들.
아마 그 영향이 지금 나에게도 미치고 있는 것 아닌지 생각하게 되었다.
보통 가족이라함은 같은 지역에 사는 것이 당연할진대,
우리가족은 매우 띄엄띄엄 떨어져 살고 있다.
일단 증조할아버지부터 살펴보자면,
증조할아버지는 원래 황해도 사리원이 고향이신데 한국전쟁당시(1950) 남쪽으로 피난을 오셨다.
증조할아버지는 첫째 아들은 아니지만 당신의 가족들을 데리고 일단 3.8선 이남으로 내려오신 것이다.
그래서 증조할아버지는 나의 할아버지를 비롯한 여러 자식들을 데리고 전쟁의 불길을 피하고 있었으나
휴전이 되면서 영영 당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이건 나의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완전히 휴전이 이루어지기 전에 나의 할아버지는 제주도에 내려오셔서 나의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당시 꽤나 급진적인 생각을 갖고 계셨던 나의 할머니는 제주도를 떠난다는 생각에 반대를 무릅쓰고 육지로 떠나게 된다.
왜냐하면 할머니께서는 많은 형제들을 밑에 둔 첫째딸로 머리는 똑똑했지만 공부는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당시 제주도는 너무나 황폐한 땅이었기때문에 어린나이었지만 꼭 이 땅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하셨단다.
그래서 할머니는 이북 남자와 결혼하고 강원도 원주에서 나의 아버지를 낳으셨다. (1955)
당시 할머니의 나이 스물하나였다.
그 후 강원도에서 서울로 이사를 하고 할머니는 아버지말고 세 아들을 더 낳게 된다.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에 집을 마련해 살게 되고 아무것도 없었지만 나름 단란하게 살던 가족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1958년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사고로 다리를 다치게 되고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였지만 12시간에 거친 대 수술을 자라면서 5~6번 거치며 아버지는 성장하게 된다.
그리하여 첫째 아들이었던 아버지는 그 나름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된다.
아버지의 동생들은 다리를 다친 형을 보살피고 부모님을 도와 똑똑한 아이들로 자라났다.
1970년대, 아무것도 가진것 없는 아버지의 가족은 오직 공부만이 살길이라 생각하며 끊임없이 공부를 했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건국대학교 사학과, 둘째 삼촌은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셋째 삼촌과 넷째 삼촌은 연세대학교 상경대학에 진학,
아들 넷 있는 집에서 꽤나 이름있는 학교를 들어갔다며 주위의 부러움을 사게 된다.
하지만 1978년 할아버지가 갑상선 암으로 돌아가시고, 형제들은 전보다 더 곤궁한 삶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대학생 넷 있는 집이었지만 등록금을 제대로 대주지 못해
아버지를 제외한 나머지 삼촌들은 과외를 하면서 등록금을 대거나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녔다.
당시 통행금지가 있었으므로 삼촌들은 밤새 과외를 하고 아침에 집에 와서 가방만 챙기고 다시 학교를 나가는 생활이 반복,
돈도 벌어야 하고 공부도 해야하는 이중생활고에 시달리게 된다.
하지만 사회의 엘리트로 자라 아버지는 제주도에서 교사, 둘째 삼촌은 IBM, 셋째 삼촌은 한화증권, 넷째삼촌은 MS에 취직,
그야말로 지적 자원을 이용한 성공의 전형적인 케이스를 보여주게 된다.
그리하여 네 형제 모두 차례대로 결혼을 하게 되고 아이를 낳았으며 현재도 학업을 우선시하는 아버지들이 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맨바닥, 쓸만한 것이라곤 머리밖에 없다는 생각에 공부만 했던 나의 아버지와 삼촌들.
아마 그 영향이 지금 나에게도 미치고 있는 것 아닌지 생각하게 되었다.
# by | 2008/02/08 21:44 | 내가보는세상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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